연극 창조행위에 기여하는 또 하나의 요소를 연극 윤리라 부르고 싶다.
연극 윤리
배우는 작품의 전반적인 상황뿐만 아니라 예술이 추구하는 목적을 구현하기 위해 질서와 규율과 도덕적 양식이 필요다. 배우가 언제나 최상의 모습으로 관객의 시야에 들어와, 박수갈채를 받고, 엄청난 찬사를 받고, 칭찬하는 비평서를 읽는 일련의 행동들은 끊임없이 개인적인 허영심을 부추기고 감각을 자극한다.
그러나 만일 배우가 거기에만 안주하려 든다면 배우는 의기소침해지며 하잘것없이 사소한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경박하고 비천한 배우는 그런 삶에 매료되어 안주하려 들고 그 때문에 타락하여 파멸의 길을 걷게 되지만 진지한 배우는 그런 삶에 오래도록 안주하지 않는다.
때문에 연극 세계에서 배우는 자신을 철저히 관리해야 하고 원칙을 준수하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이 원칙을 따르며 예술 속의 자신을 사랑하지 말고 자신 속의 예술을 사랑하자.
자기 과시
어떤 이미지나 창조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에 빠져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배우들이 있다. 이런 배우들은 로미오와 햄릿을 연기할 때만 필요하다. 마치 경박스러운 여자가 새 옷을 요구할 때처럼 말이다. 대부분의 배우들은 대사를 매개로 해서 그들 나름의 고유한 방법으로 특이할 만한 목소리, 발음, 낭송 태도 및 목소리를 내 눈 수법을 과시한다.
무대에서의 매력 때문에 배우가 파멸을 자초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왜냐하면 이런 배우는 자신의 관심과 테크닉을 오로지 자기 과시의 수단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배우가 자연이 선물한 그의 재능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으면 마치 자연이 배우에게 복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자화자찬이나 자기 과시는 매력의 힘을 망가뜨리고 파괴하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배우는 훌륭하게 타고난 재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과시 때문에 스스로 희생되고 만다.
예술의 악용자
연극은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방대한 작업이기 때문에 자신의 아름다움 만으로도 돈을 벌거나 경력을 쌓으면서 많은 사람들을 매료할 수 있다.
이들은 무식한 대중, 왜곡된 취향, 편애, 음모, 엉터리성곡, 그밖에 창의적 예술과는 무관한 다른 수단들을 이용한다. 예술을 악용하는 이런 자들이야 말로 예술의 가장 무서운 적이다.
앙상블
어떤 배우가 정성들여 마무리한 공연에서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배역과는 너무 동떨어져 완전히 일상적이고 기계적인 방법으로 연기했다고 가정해 보자.
배우가 이럴 권리가 있는가? 배우는 자기 혼자만 공연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가 전적으로 공연을 책임을 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 공연에서 한 사람은 전체를 위해서, 전체는 한 사람을 위해서작업한다. 거기에는 서로의 책임이 뒤따라야 한다.
집단 창조의 노력은 연극 예술의 뿌리이다. 이것은 앙상블 연기를 요구하며 이 앙상블을 해치는 자는 누구든 자신이 헌신하고 있는 예술에 대한 죄를 범하는 것이다. 관객은 극 속에서 활동하는 배우들을 좋아한다. 극 속에서 배우들은 명확한 초목표와 잘 다듬어진 관통 행동을 수행한다. 앙상블 연기, 훌륭한 배우 그리고 상연되는 극에 대한 합당한 이해력 등이 모두 거기에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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