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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훈련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 연기공부

by 진뚜리버 2024.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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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학이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약 기원전 330년 이래 오랫동안 화려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후기 그리스나 라틴 문화에서 시학의 영향력에 따른 추종 작품이 있긴 하지만, 시학에 관한 보다 깊은 내용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중세에 들어 시학은 시리아와 아랍의 학자에 의해 알려졌지만, 대부분 오해된 채로였었다. 

시학의 근대적 생명력은 15세기 말엽 이탈리에에서 비롯된다. 그 이후 시학은 권위로서의 영예를 얻으며, 수세기에 걸쳐 여러 언어로 번역되고 편집되거나 주석이 가해졌다. 그러나 그것은 탐구심에서보다는 숭배심에 의해 받아들여졌던 것이 사실이다.

시학은 아직도 살아있다. 시학은 예리한 시각과 박식하고도 조직적인 방법론에 의하여 쓰인 예술에 대한 위대한 연구서이기 때문이다. 시학은 문학 비평의 최초의 업적이며 인류 최초의 과학적 연구가에 의하여 쓰인 문학론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는 살로니카 동쪽에서 약 40마일되며, 에게해의 북쪽 끝에 있는 캘시다이스의 스타기라에서 B.C 384년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마케도니아의 아민타스 왕 아래에서 궁정 의사를 지냈다. 이 점 이 그가 알렉산더 대왕과 친분을 맺고 모든 주제를 생물학 적인 관점에서 관찰하는 습관을 지니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그는 어머니를 통해서도 의학적 분석 정신을 물려 받고 있었다. 15세 때 소위 말하는 대학교육을 시작하여 플라톤의 아카데미에서 20년 동안 연구했다. 그로부터 에게해의 여러 섬과 소아시아를 돌아다니며 교수를 했던 5년이 지났을 때, 그는 마케도나이의 필립왕에 의해 그 당시 15세였던 아들 알렉산더의 개인교사로 지명되었다. 

그는 이 직무를 7년동안 가지고 있었는데 그동안에 그의 관심사에 관한 백과사전적 지식 영역과 명료하고도 교훈적인 설명 방법을 이룩하였음이 확실하다. 알렉산더는 그 당시 사람 중 가장 박식한 사람을, 아마도 모든 인류 중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을 개인교사로 가지게 된 셈이다. 그가 끼친 영향력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주위 야만인을 그리스 인에 가깝게 전향시킨 것도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력에 의해서이다.

알렉산더는 일리아드의 출판을 촉진시켰으며, 그리스 역사가나 학자들의 기록을 보면 그가 오랫동안 참전 했음도 알 수 있다. 그는 식민지 정책으로 근동지방에 그리스 문화를 폭넓게 펴나갔고 그 결과 알렉산드리아는 지식의 중심지가 되었다.

시학의 저술 목적

시학은 실제적인 강의용 교재였다. 강의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묻고 있다. 시극에서 찾아야 할 것은 무엇이며 피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러한 극이 의도하는 효과는 무엇인가, 그 목적의 성취 여부에 따라 각의 형태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어떤 방법으로 그 의도는 얻어지며 왜 어떤 작가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기도 하는가, 비평가가 시인과 상대적으로 가져오는 책임은 무엇이며 그 책임은 어떻게 역전되는가 등

시학은 아테네 사람들이 어떤 문학비평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실제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도덕상의 목적이다. 그리스 작가들은 도덕적 개념 하에서 인생과 자연의 모든 양상을 관조한다. 그들은 인간 행위에 가능성 있게 받아들여지는 영향력에 관해 무척이나 관심을 쏟는다. 

그래서 이리스토텔레스는 관객의 입장에서 비극의 효과는 그들에게 유익한 어떤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애썼다. 이것을 증명할 때 그는 기니스가 당신 건강에 좋을 것이오라고 장담하는 사람처럼 청교도 기질의 반대 주장에 접하게 되었다. 

시는 우리가 시들게 버려둔 것에 물을 뿌려 준다. 마치 감정이란 완전히 땅속에서 유지될 수 있는 하나의 싹과도 같은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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